자주국방 KFRX : 85 크로와상 월드

 

85 :


"찾았다!"
한창 포천에서 고기 굽기 바쁠 때.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 인터콘티넨탈 호텔 뒷길.
"군용 GPS 이용해서 고기집 찾기라니 너도 참 대단하다."
"그냥 고기집이 아냐! 스테이크 집이라고! 그것도 무한리필!"
"또 고기냐? 어제도 고기 먹고 또?"
"어제라니! 같은 고기라도 다르다고! 부담 없는 수육과 오늘은 몸에 좋은 스테이크!한식과 양식! 돼지와 소! 아저씨 말이야. 이제 부대에서 행사 때 먹던 도살장에서 막 잡은 쫀득한 껍질에 살점이 탱탱한 시골 돼지고기 지겹지 않아?"
"그 입가에 침 흐르는 건 지겨워서 흐르는 거지?"
김병장의 적절한 지적에 설웅은 황급히 소매로 입가를 닦았다.
"그, 그래! 물려서 흐른다! 아무튼 들어갈 거야? 안 들어갈 거야?"
"그러지 뭐. 내 돈 내는 것도 아닌데."


잠시 후.
"…라고는 해도 아무리 내 돈 안낸다지만."
개성 없는 간소한 인테리어의 식당 안에서 간소한 메뉴판을 들쳐보며 김병장은 간소하지 않은 가격에 혀를 내둘렀다.
"야, 여기 아무리 무한리필이래도 일인분에 이만팔천원인데 너 무리하는 거 아냐?"
"여기 두개 주시고요. 음료수는 사이다하고… 아저씨는 뭐 마실래?"
"야, 너 내 말 듣고 있어?"
또 들은 체 만 체하는 설웅을 향해 김병장이 보일 듯 말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냥 같은 걸로 주세요. 왜 그래? 아저씨가 내려고?"
"아니 그건 아니지만…"
"그럼 그냥 먹어. 월급쟁이 좋은 게 뭐야. 가끔 돈지랄도 할 수 있으니까 좋은 거지."
엄연히 말하면 이쪽 '된장질'에서 이건 저렴한 짓이었지만 김병장이 그런걸 알 턱이 없었다.
"그래도 그렇지 어제야 내가 식비 받는 셈 치고 네 돈으로 장 봤지만 오늘은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이게 왜 이래. 아저씨도 지금 이거저거 따지면 월 이백은 넘게 받으면서. 옛날 병장 십만원 받을 때 개념이 아직도 남아있어?"
"하긴 그렇지만…"
"걱정 마. 부대에 있을 때 써도 써도 남아도는 게 내 월급이니까. 내가 좀 능력녀라 지금 연봉만 육천이 넘거든요?"
"하여간 월급 받는 장비라니…"
"실례하겠습니다."
특수장비 취급에 기타 등등 수당까지 듬뿍 받는 둘이서 하는 소리지만 영문을 알 리 없는 점원은 그냥 애들이 농담하나 생각하며 가져온 샐러드와 볶음밥과 피클, 그리고 매콤해 보이는 붉은 소스와 잘게 썬 백김치 비슷한 야채절임을 상 위에 올려놓았다. 이윽고 갈색으로 맛깔나게 구워진 두툼한 등심 스테이크가 나오는 것으로 일단의 상차림이 끝났다.
"자 그럼 먹자!"
글라디우스를 루트한테 박을 때처럼 설웅이 힘차게 고기를 칼로 썰어내며 콧노래까지 나직하게 흥얼거렸다.
"잘 먹을게. 야, 근데 이거…"
"왜? 돈 얘기 또 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왜 이리 질기냐?"
포크로 고기를 꾹 찍고 있음에도 김병장의 칼끝에서 고기는 썰리기는 커녕 칼의 움직임을 따라 접시를 문지르고만 있었다.
"아이구 바보야. 고기를 결대로 써니까 그렇지. 수육은 잘 자르면서 같은 고기인데 스테이크는 못 잘라?"
"내가 뭐 이런 거 자주 먹어보기나 했나. 칼 들고 먹는 건 돈가스나 먹었지."
'초보자인거 들키기 싫은' 남자의 본성에 의해 김병장은 부끄러워하며 열심히 고기를 잘라보려 했지만 여전히 먹음직스러운 등심은 접시 위에서 미트스핀만 롸운롸운 돌아가고 있었다.
"하 이거 참…"
"으이구. 그러다 접시 닳겠다."
하루 이틀 들어온 핀잔이 아님에도 김병장은 새삼 얼굴이 빨개지며 화끈한 느낌이었다. 그때 놀라운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으니.
"이렇게 썰라고. 이렇게 말이야."
설웅이 무려 자신의 접시에까지 '원정'을 와서는 손수 스테이크를 잘라주는 것이었다.
"…"
"왜 그렇게 빤히 쳐다봐? 뭐 묻었어?"
"아, 아니! 그냥 저기 고맙다고."
"흥! 고마워 할 거 없어. 그냥 내가 정신 사나워서 그러는 거니까."
한번 신경 써 줄때마다 듣는 설웅의 지겨운 변명이었지만 언제나 들어도 그리 싫지 않은 소리였다. 어떻게 보면 그게 설웅에게 유일하게 있는 '내숭' 이기도 하고 말이다.
'자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손발이 불 위의 마른 오징어처럼 오그라들만한 스스로의 생각에 김병장은 밥 먹다 말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지만.
"음음~ 역시 육식동물은 고기를 먹어야 한다니까!"
앞에 곰탱이는 고기 먹는데 입력장치 팔렸음이 분명했는지 계속 고기타령만 해댔다.
"어? 아저씨도 빨리 먹어! 그래야 다음 거 먹고 또 먹고 그 다음 리필 받지!"
"넌 스테이크 맛보러 온 거냐 본전 뽑으러 온 거냐?"
"본전. 돈지랄은 돈지랄이고 이왕 쓰는 거 뽕은 뽑아야지?"
"어. 그래. 누가 마르고 닳아도 쓰는 한국군 장비 아니랄까봐…"
잠깐 두근했던 생각은 금세 다시 옅어지며 김병장은 먹기 좋게 썰린 한 점 고기에 포크를 깊게 찔러 넣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채끝과 보섭살로 이어지는 규정 코스가 끝난 뒤, 김병장은 리필 한 장을 더 먹고는 배불러서 조금씩 더 먹을 뿐이었지만 앞에 앉은 설웅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고 먹어대었다.
"곰탱아. 아무리 MSN의 외형이 프로그램이라지만 그게 어떻게 다 들어가?"
"설명해줘? 설명하자면 HORN의 기본개념부터 이거저거 다 튀져나와서 짜증날 텐데?"
"아니 됐다."
"입 놀릴 여유 있으면 한 장이라도 더 먹어둬. 나중에 부대 들어가면 언제 또 이런 거 먹으러 나와 보겠어?"
사제 음식이라면 접시의 기름까지도 핥아먹는다는 휴가 장병의 취식자세를 용맹 정진하는 설웅과 달리 많이 먹는다고 먹었지만 다섯장부터는 슬슬 입이 느끼해진 김병장은 접시를 깨작대기만 할 뿐이었다.
"에이. 아깝긴 아깝고…"
"어라? 아저씨. 잠깐만."
"왜?"
슬슬 느끼해지기 시작한 입을 콜라로 가시던 김병장의 오른쪽 건너건너 안쪽 테이블을 설웅이 오른손의 나이프로 슬쩍 가리켰다.
"잠깐 저기 대화 오가는 것 좀 잘 들어봐."
"응?"
설웅의 말에 김병장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채 귀를 기울였지만.
"뭐가? 보아하니 뭐 소개팅이나 미팅 파트너하고 따로 나온 것 같은데. 그냥 여자 만나서 허풍떠는 거 아냐?"
"그러니까. 그걸 잘 들어보라니까?"
"들어봐야 남의 정분지사…응?!"
배도 부르겠다 슬슬 피곤해지며 시큰둥해진 기분의 김병장의 두 눈이 갑자기 놀라 또렷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김병장의 귀에 분명.
"그래요. 이건 기밀인데요. 제가 사실 바로 그 '파일럿'입니다. 휴가 나왔거든요."
이란 소리 때문이었다.
"뭐, 뭐야?! 잘못 들었나?"
놀라면서도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작게 줄인 김병장에게 설웅 역시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귀여운 얼굴을 가까이 가져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냐 맞아. '파일럿' 사칭하잖아."
"에이, 전투기나 여객기 뭐 이런 거 파일럿 이야기겠지. 사칭할게 없어서 하필…"
"와! 저도 그 영화 봤어요! 근데 그거 진짜에요?!"
'영화'란 말에 순간 김병장은 오후의 그 포스터가 퍼뜩 떠올랐다.
"뭐야! 진짜 FRX 파일럿 사칭이야?!"
"쉿! 목소리 낮춰! 이거 완전 코미디 디너쇼인데?"
짓궂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설웅이 밤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금 전까지 고기를 물어 찢던 덧니난 송곳니를 드러낸 채 씨익 웃었다.
"에이. 영화가 얼마나 진짜겠어요. 그거 제가 겪은 거에 비하면…"
"진짜 군대 겪었으면 현역은 휴가 나와도 다나까 반사겠지."
"아 좀 지방방송 끄라니까? 생중계라고!"
현역장교 둘에게, 그것도 당사자 둘에게 도청당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허풍남은 상대의 반응에 점점 더 오버하기 시작했다.
"그때 정말 대단했지요. 게다가 그 일본 녀석들하고 같이 작전해야 하니 또 제가 한국의 자존심은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랄."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김병장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영화에선 가볍게 나왔지만 그 일본 쪽 파일럿이 실제로는 얼마나 얍살한지 모르시죠?영화에선 예쁘장하게 나왔는데 실제로는 콧수염까지 길러서…"
"풉! 수염히메라니 그건 또 뭐래?"
그 와중에도 열심히 먹고 있던 설웅은 입속의 고기를 뱉을 뻔해 간신히 손바닥으로 가렸다.
"근데 어떻게 알아보는 사람은 없는데 사칭하는 사람은 있냐."
"왜, 가끔 뉴스에서 단신으로 나오잖아. 왔노라. 붙었노라. 다 부셨노라."
"아무튼 아주 듣는 내가 다 소름이 돋아 미치겠다. 유치원때 여자애들 앞에서 팬티까지 벗겨진 이후로 이런 쪽팔림은 처음이야."
"왜. 그래도 저 아저씨가 그쪽 아저씨보다는 잘 생겼잖아?"
"이 곰탱이가!"
"아, 나 좋은 생각났어."
손가락을 딱 튕기며 또다시 묘하게 비웃는 설웅의 표정을 본 김병장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몸서리치며 말했다.
"뭐, 뭔데? 설마 나한테 하듯이 가서 한대 쥐어박으려는 건 아니겠지?"
"아저씨는! 내가 뭐 맨날 주먹 박에 모르는 바보인줄 알아? 잘 보라고."
말을 마친 설웅은 옆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가지고 있던 메모장과 펜을 꺼내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야! 뭐하려는 거야?"
"보면 몰라? '국가영웅'한테 사인 받으러 가지!"
"야! 야! 잠깐!"
이러다 송장치우겠다 싶은 생각에 김병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다급히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설웅은 뒤도 안돌아보고 문제의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으아~ 이러다가 휴가 복귀는 헌병대로 하는 거 아냐? 제발 그냥 장난만 쳐라 제발…"
그동안 당해 온 게 있는지라 사태가 여차하면 유혈사태로 악화되리란 것을 너무도 잘 아는 김병장은 가슴을 감자 졸이듯 푹 졸이며 조마조마하게 설웅의 등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응?"
"어머?"
평소의 때 묻은 말투가 아닌 약간 가식적인 청명한 목소리로 설웅이 꾸벅 '짝퉁'에게 인사를 했다.
"실례지만요. 저쪽에서 이야기 들었거든요? 정말 '아저씨'가 그 파일럿이세요?"
설웅의 당돌함 때문인지 아니면 이 사람이 그저 여자에게 잘 보이려는 가벼운 거짓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직설적인 질문에 적잖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어? 어! 그래! 내가 그 FRX란 로봇의 파일럿이란다."
"정말요! 와! 진짜요?!"
여전히 해맑은 목소리로 기뻐하는 설웅을 보며 '진짜 아저씨'는 이를 부르르 떨었다.
"으윽… 듣는 내가 다 속이 니글거린다. 무슨 부산 토박이 억지 서울 말투도 아니고 꼴에 호야 말투를…"
김병장이 그러던지 말든지.
"제가 이제 고1인데요. 그게… 여자애가 로봇에 관심 많다고 하면 다들 이상해하잖아요? 그래두 전 그런 게 좋아서 나중에 학교두 그쪽으로 갈까 생각중인데… 아니 그게 중요한건 아니구요. 그래서 FRX에 되게 관심 많아요!"
"그, 그러니?"
"예! 아니면 나중에 여군으로 가서 파일럿 할까도 생각하고 있어요!"
순진무구한 웃음을 지으며 설웅은 속으로는 시커멓게 비웃고 있었다.
'아 젠장! 이상한 거 물어보면 어쩌지?!'
라고 당황하는 생각이 똑똑히 읽혀졌기 때문이었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파일럿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 그거야 그… 저기… 음! 미안한데 그건 기밀이다."
"어? 하지만 공군이나 이런 데는 파일럿 뽑는 게 기밀은 아니잖아요?"
"내, 내 말은 FRX 파일럿을 말하는 거지! 일반 파일럿이야 인터넷에 물어보… 아니 군대에 지원하면 되잖아."
"아 그렇구나… 그런데 저번에 뉴스 보니까 부대가 연천에 있다던데 맞나요? 보니까 되게 시골에 있던 것 같던데…"
"어쩔 수 없잖니. FRX란 거대 로봇을 운용하는 부대니까 주변이 탁 트여야…"
"아! 죄송해요. 제가 포천하고 헷갈렸네요!"
"아, 아 참! 그렇지! 네가 너무 자연스럽게 말해서 나도 헷갈렸다. 하하…"
"저희 오빠도 지금 그쪽에서 복무하거든요. 부대 이름이 맹웅대대인가?"
"아! 맹웅대대? 그거 우리 부대에서 좀 떨어져 있던데?!"
"병신아! 맹웅대대가 KFRX대대다!"
둘의 대화는 듣는 김병장이 아주 소름이 돋을 정도였지만 그러던지 말든지.
'흥! 슬슬 상대 여자가 널 의심하는 건 알겠냐? 이제 결정타를 날려주마!'
헌병 앞에서 각잡다가 칼각잡게 생긴 정말 운 없는 상대를 향해 설웅은 일생에 다섯 번이나 부려볼까 싶은 내숭연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어머머머! 죄송해요! 예쁜 언니하고 데이트 중이신데 제가 말이 너무 길었네요!"
"아, 아니다. 난 괜찮아."
"아, 그럼 죄송한데 부탁 하나만 더 들어주시겠어요?"
"응? 뭐니?"
"헤헷~ 여기 사인 좀 해주세요!"
"뭐 어렵진 않지. 이리 줘봐."
설웅이 내민 메모장과 볼펜을 받아 든 남자는 대충 사인을 크게 휘갈겨 써서 설웅에게 돌려주었다. 물론 은근슬쩍 볼일 다 봤으면 빨리 가라는 식의 표정도 함께 말이다.
"저기 진~짜 진짜 죄송한데요!"
"또 뭐가?!"
살짝 욱한 목소리의 대답에 설웅은 여전히 눈치 없는 척 영업미소로 생글거렸다.
"제가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요. 걔도 로봇에 관심 많거든요. 제가 오늘 FRX 파일럿 만났다고 하면 안 믿을 테니까 제가 여기서 직접 영상통화인증 해봐도 돼요?"
"아 저기 그건…"
"뭐 어때요. 애 귀여운데 이왕 소원 들어주는거 마저 들어줘요."
조금씩 의심스럽긴 해도 설마설마하며 아직 경계는 하지 않는 상대 여자의 말에 남자는 완전히 사면초가가 되었다.
"그래. 그러지 뭐. 대신에 빨리 끝내주겠니?"
"와! 고맙습니다~ 그럼 잠시 만요!"
팔짝팔짝 뛸 것처럼 기뻐하는 설웅이 당연히 휴대폰을 꺼낼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편히 잠드소서."
김병장의 애도문과 함께 저쪽 테이블에선 두 남녀의 깜짝 놀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어, 언니? 무슨 일이야? ]
그도 그럴 것이. 갑자기 사람이 허공에 채팅창 같은걸 띄워놓더니 그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갈비 구워먹고 있는 영상이 실시간으로 비춰지면 누구라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화이트니? 나 지금 FRX 파일럿이란 사람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사인도 받았다~!"
[ 응? 김병장이야 맨날 보는 얼굴인데 뭘 새삼스레. 언니 저번에 금주 설정 고치더니 술이라도 먹었어? ]
"아냐! 진~짜 FRX파일럿이래!"
[ 뭔 자다가 봉창 뚜드리는 소리야. 두나도 호야도 여기 있는데. ]
[ 어? 큰언니! 휴가 재밌어요? ]
"호야니? 밥 먹으러 나왔어?"
[ 예! 지금 박 소위 삼춘하고 밥 먹어요! ]
말 그대로 급작스런 급전개에 당황해하던 상대 여자는 간신히 조금 정신을 추스르고는 설웅이 공중에 띄운 스크린을 슬쩍 쳐다보았지만 도리어 비명을 지르며 패닉에 빠져버렸다.
"꺄아! 애가 머리에 여우귀가 달렸어!"
"그래 우리 호야. 작은언니 말 잘 듣고 나중에 언니가 호야 선물 사서 부대 복귀할게."
[ 와! 정말요? 큰언니 최고야! 그럼 큰언니도 휴가 재밌게 보내세요~! ]
[ 어이 웅아! 거기 동생 있냐? 휴가 잘 보내라고 누나가 그런다고 전해라! ]
"예. 피 대위. 아! 화이트 술 좀 적당히 먹게 하세요. 걔 취하면 여자한테 치근대니까."
[ 그래? 더 궁금해지는데? ]
[ 언니도 참. 아무튼 우리는 우리대로 주지육림으로 바쁘니까 이만 끊는다? ]
"그래. 잘들 놀아~"
설웅이 통신스크린을 끄자 엄청나게 어색한 침묵이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자 그럼. 실례했습니다."
실례 정도가 아니라 아주 홀랑 다 뒤집어놓고선 여전히 가식적인 목소리로설웅은 꾸벅 인사를 하고는 자기 테이블로 돌아갔다.
"곰탱아!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생각이 있냐?"
설웅이 다시 자리에 돌아오자마자 가슴을 잔뜩 졸이고 있던 김병장의 분통에 설웅은 무심하게 대답했다.
"미안, 나 원래 이런 놈이다."
그리고 설웅의 그 말에 대한 화답은 엉뚱한데서 터져 나왔으니.
"아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우욱!"
토트백이 풀스윙으로 공기를 가르는 비행음과 뒤이은 가죽과 가죽이 착 감겨붙는 소리, 그리고 고통에 뒤틀린 남자의 신음소리가 식당 내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다시금 끌어 모으며 그 뒤를 이었다.
"끝났네."
"설웅. 그래도 너무 심한 거 아냐? 적당히 경고만 해도…"
"심하다고?"
사이다를 쭉 들이켠 설웅이 빈 컵을 식탁 위에 세게 내려놓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아아니 전혀. 저 여자 생각해서라도 이게 낫지. 설마 아저씨 저 놈팡이 편들어주는 건 아니지?"
"그야 물론 아니지. 하지만 내 말은 다른 방법이…"
"아아, 아님 됐어."
김병장의 잔소리에 설웅은 팔짱을 낀 채 한손으로 손사래를 치며 고개를 획 돌렸다.
"아저씨는 기분 나쁘지도 않아? 뭐 나야 아저씨 체면 따위 알 바 아니지만, FRX인 내가 저런 어중이떠중이 떡밥으로 취급 받으니까 기분이 나쁘더라 이거지."
말을 마친 설웅은 일부러 김병장에게 시선을 주지 않으려 식당 천장을 한번 휘 둘러보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뭐 하러 갈까?"


자정. KFRX 대대 설웅소대 생활관.
그냥 누우면 꼬리가 배기는지 살짝 옆으로 비껴 대자로 누운 염호를 토닥거리던 화이트가 그윽하게 웃으며 어린 아이의 보드라운 볼에 자신의 탄력 좋은 볼을 비비었다.
"우리 호야 잘 자네~"
흘러내린 다홍색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주며 화이트는 잠든 염호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굿나잇땡을 위해 관물대 위에 올려져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별 말도 없이 키 182에 풍만함과 가녀림을 겸비한 뛰어난 미모에 언제나처럼 안 어울리게 회색 추리닝 차림의 화이트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야간 흡연 장소인 화장실로 천천히 향했다. 그렇게 담배 한 개비 빼물고 막 화장실에 들어서던 즈음.
"에이. 아무리 그래도 소대장님하고 부소대장님하고 붙어 다닌 시간이 있는데."
"아냐. 옆에서 봐서 알잖아. 그런 사이 아니라니까?"
"음?"
안에서 염호소대 하사들과 설웅소대 하사들이서 하는 이야기를 들은 화이트는 입에 문 담배개비를 손으로 옮겨 쥐고는 귀를 기울였다.
"야, 그럼 내기할래? 난 이번 휴가 때 분명 부소대장님이 소대장님하고 일치른다에 건다!"
"그 일이 뭔데? 초상 치르는 거?"
"농담해? 남녀가 붙어 다니면 뻔 한 일 있잖아 그거!"
"이 자식 봐라? 그건 네 욕구불만이고. 너 부소대장님 꽉 잡혀사는거 보면서 그런 게 가능할거라고 생각해? 부소대장님도 목숨은 아까우실거 아냐. 게다가 부소대장님 나이도 생각해야지. 난 아무 일도 없다에 건다."
"좋아! 그럼 부소대장님 휴가 복귀하면 물어보자고!"
슬슬 이야기가 무르익자 마침내 등장 타이밍을 잡은 화이트는 화장실 문을 벌컥 열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짧게 외쳤다.
"요 녀석들!"
"어?! 으앗! 화 소령님!"
갑작스런 화이트의 등장에 중심적으로 말하던 둘을 포함한 너댓의 하사들은 마치 왕고 흉보다가 상병한테 걸린 이등병 무리처럼 새파랗게 질린 채 그대로 꽁꽁 얼어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화이트가 누구던가.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자, 잘 못 들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고 이것들아."
갈구는 목소리가 아닌 짓궂은 억양에 그제야 하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저흰 그냥…"
"아냐. 이해는 가니까. 이 좁은데서 그런 농담도 못하면 군 생활 무슨 재미인데."
갈구자면 감히 하사신분으로 영관급 장교를 농담과 음담거리고 삼은 것도 모자라 군법으로 금지된 사행성 내기까지 걸었으니 간부인 이상 징계를 받아도 할말 없는 하사들은 화이트의 말에 이젠 화색이 돌 지경이었다.
"다시 묻겠다. 그게 그렇게 궁금한가?"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인 화이트가 담배를 문 채 재차 묻자 서로 얼굴만 쳐다보던 하사들은 슬슬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궁금하지 않습니까. 괜히 군인들이 드라마 열심히 보겠습니까."
"뭐 그렇긴 하지. 일종의 재미라고 쳐 줄 수는 있으니까."
"말이 나왔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음? 뭔데."
"화 소령님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령님이 제일 잘 아시잖습니까."
"이 자식 개념이 아주 당돌하게 없구만. 그래. 나도 공범 만들겠다 이건가?"
"그, 그런 건 아닙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부소대장님도 남자고 소대장님도 여자니 그렇게 생사고락 붙어 다니면…"
"이게 무슨 연애물이냐. 아무튼 너희들 되게 궁금한 것 같은데 말이야."
깊게 빤 담배연기를 천천히 내뱉은 화이트는 반쯤 감은 눈으로 무표정하게 말했다.
"내가 지금 한번 물어봐줄까?"
"예?! 정말이십니까?"
"뭐 어때.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군인 소원은 못 들어줄까."
말을 마친 화이트는 팔짱을 낀 채 자신만 보일 수 있도록 통신스크린을 작게 만들어 허공에 띄웠다.
[ …어. 화이트. 밤늦게 무슨 일이야? ]
스크린속의 설웅은 거실 소파 위에 외출복 차림에 잠에 취한 얼굴로 두 눈을 비비고 있었다.
"아니, 궁금해서 한번 걸었어. 그래. 김병장 집이야?"
[ 어. 대체 몇 시… 우와! 자정이네?! ]
"근데 언니. 지금 들어온 거야? 김병장은?"
[ 아저씨? ]
뭔놈의 프로그램이 피곤함과 잠에 취해 연산능력까지 흐려지는지 비몽사몽의 설웅은 그냥 생각 없이 말을 뱉어 버렸다.
[ 옆에서 자고 있어. ]
"후아앗!"
"쉿!"
'정분'쪽에 건 하사들조차 놀라며 나직이 탄성을 지르자 화이트가 재빨리 코에 손가락을 가져다대며 조용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둘이 잘 보냈나보네?"
[ 어 뭐 그저 그랬어. 재밌긴 했는데 생각보다 많이 힘들더라. 피곤하기도 하고. ]
지금 무슨 오해를 받고 있는지 모르며 설웅은 몇 시간 전을 되돌려 떠올렸다.
"으아아아아…"
약 세 시간 전. 강행군을 끝마치고 간신히 집에 돌아온 설웅과 김병장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실 소파 위에 픽 쓰러져서는 잠깐 쉰다는 게 둘 다 깜빡 잠이 들어버린 것이었다.
[ 아 몰라. 이 인간은 왜 옆에서 같이 쳐 자고 있는 거야? 아무튼 난 가서 자련다. 너도 빨리 자라. ]
"그래 언니. 푹 쉬어."
통신 스크린이 사라지자 화이트의 눈앞에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콩닥거리고 있는 시커먼 남정네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 다들 들었지?"
그 말에 내기를 어느 쪽에 걸었던 좌중은 한 마음 한뜻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화이트의 뒤통수치는 한마디에 그저 짧은 순간으로 끝났으니.
"아무 일도 없단다. 됐냐?"


"으아아암… 화이트 아니었으면 아침까지 잘뻔 했네. 음?"
가벼운 수다로 정신이 든 설웅은 문득 허벅지 위가 무거운 기분에 옆을 쳐다보았다.
"…이 자식이 드디어 미쳤구나."
사람은 잠에 취하면 온기를 찾는 법. 상병과 이등병이 저도 모르게 껴안고 자게 된다는데 하물며 옆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있다면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꺼져!"
김병장이 배게 삼고 있던 자신의 허벅지를 잽싸게 끌어당겨 뺐지만 잠들면 엎어버려도 모르는 김병장은 도저히 깰 줄을 몰랐다.
"쳇, 막판에 기분 찝찝하게시리."
마치 벌레라도 올라붙은 기분을 느끼며 설웅은 치마를 탁탁 털어대었지만 계속 눌려있었기 때문인지 감촉이 쉽게 사라지질 않았다.
"아 이거 왜 이래? 아우 소름 돋아… 거 되게 찝찝하네! 사람이라면 씻기라도 할 텐데… 아니지?"
계속 허벅지에서 드는 위화감에 몸서리치던 설웅은 방으로 향하다 말고 옆 화장실 겸 욕실로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호야가 목욕 해보면 싹 씻기는 느낌이 좋다고 했지… 한번 해봐? 아냐, 졸린데 그냥 들어가?"
침대와 욕조 사이에서 고민하는 설웅에게 계속 치마 속 허벅지의 지렁이 기어가는 감촉은 조속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음… 음…"
그리고 잠시 후.
"흣! 앗 뜨거!"
여전히 옷 설정은 안 바꾼 채로 처음으로 욕조란 것에 물을 받아보는 설웅은 인상을 찡그리며 온냉수조차 제대로 못 맞춰 데인 손을 탈탈 털어댔다.
"뭐 이제 물은 이정도면 된 것 같고… 들어가기 전에 씻어야 하는 건가? 이거 목욕이란 걸 해봤어야 알지. 에이! 밖이나 안이나 몸에 물 다는 건 똑같은데 그냥 들어가!"
그리고 첨벙거리며 욕조 안에 들어간 설웅은 그제야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아차! 이거 옷 벗고 들어가는 거지!"


"으음… 뭐야. 벌써 새벽 한시야?"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던 김병장은 꿈결에 물소리를 듣고서는 형광등에 부신 두 눈을 끔벅거리며 휴대폰 시계를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 피곤해. 술 먹고 들어와도 이렇게 뻗은 적은 없었는데… 어이. 설웅. 설웅? 얘 어디 갔어? 들어가서 자나? 쩝. 좀 깨워주지…"
말을 마친 김병장을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제자리에서 기지개를 쭉 폈다.
"하암… 그럼 나도 들어가서 자야겠다. 그 전에 화장실…"
그리고 김병장은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불 켜진 화장실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갔다.
"뭐야. 왜 불 켜져 있… 우아악!"
조심성 없이 문을 연 김병장의 비명에 뒤이어 알몸을 들킨 소녀의 수줍은 비명과 함께 피와 살점이 튀는 복수가 시작돼…는게 아니라 엉망진창 텅 빈 화장실 안 타일바닥을 가득 적신 물기를 밟고 그 자리에서 뒤로 널브러져 버렸다.
"아으야야… 뭐, 무야 이거! 화장실 꼴이 왜 이래? 으으… 뒤통수야!"
그리고.
"뭐야 병신. 자빠졌나? 에이. 설마 죽기야 하겠어?"
첫 목욕을 기분 좋게 마친 잠옷 바람의 설웅은 깨끗이 비운 빈 우유잔을 책상 위에 올려놓더니
생글거리며 침대 위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 생각보다 기분 좋네 이거! 앞으로 자주 해야지~ 그럼 자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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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미성년자는 벗거나
베드씬 나오면 안되는거 아시죠?"
…거기 당신. 야설이라도 바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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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정말 눈뜨고 못봐주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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