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국방 KFRX : 86 크로와상 월드

 86 :


다음날. 늦잠이 달콤한 일요일 아침.
"앗 뜨거!"
냄비 속에서 펄펄 끓는 무국을 한 숟가락 떠 먹어보던 설웅은 데인 입술을 황급히 감싸 쥐었다.
"크… 사람이었으면 입술 부르텄겠네. 그나저나 조리법 다운로드 받아도 직접 하려니 꽤 어렵네?"
인상을 곱게 찡그리며 입술을 문지르던 설웅은 이번엔 나무주걱을 들고 프라이팬 위에 칼집이 난 채 무질서하게 흩뿌려진 비엔나소시지를 돌돌 볶기 시작했다.
"으… 몇시지?"
4월이 깊어갈수록 점점 따가워지는 밝은 햇볕에 눈부셔하며 간밤에 죽을 고비를 넘겼던 김병장은 머리맡을 더듬거려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어?! 10시 넘었네?"
화들짝 놀란 김병장은 이불을 박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외쳤다.
"곰탱이 밥 줘야 하는데!"
'아저씨 밥 내놓으란 말야 징징'거릴 설웅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김병장은 사육사 같은 소리를 지껄이며 황급히 방을 나섰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사기그릇을 숟가락이 긁는 소리가, 코끝에는 고소한 냄새가 먼저 걸렸으니.
"어? 아저씨 이제 일어났어?"
메이드 복장에 대한 반감으로 앞치마조차 싫어하는 설웅이 추리닝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는 혼자 이것저것 차려놓은 채 아침밥을 챙겨먹고 있었다.
"어… 먹고 있었네?"
"그럼 목마른 놈이 우물 파지 자는 놈이 우물 팔까."
케첩과 양파를 넣고 볶은 비엔나소세지를 우물거리며 설웅은 아침부터 깔깔이 속감처럼 굴었다.
"미안. 내가 차려줘야 되는데…"
"흥! 그럼 시계를 맞춰놓고 자던가! 내가 이 짬에 배고파서 직접 밥 차려먹어야 하나?"
자비는 안중에도 없는 설웅의 말에 김병장은 "내가 니 시다냐?"란 말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식비까지 받아놓고 밥 안차려준건 그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명백히 합의사항 위반이었다.
"쯥. 아무튼 잠을 잘 잤네~ 이게 얼마만에 자보는 늦잠이야?"
오며 가며 3주 가까이 시차에 시달리고는 귀국 후에도 2주나 격무에 시달려야 했던 날들을 떠올리며 김병장은 아직 욱신거리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늘어져라 하품을 했다.
"저기 근데 아저씨."
"왜?"
냉장고에서 보리차를 꺼내 마시던 김병장은 밥그릇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는 설웅을 돌아보았다.
"이거 국이고 반찬이고 좀 많이 만들어서. 짬처리하긴 아까운데 와서 좀 먹지? 배 안고파?"
"글쎄. 배는 별로…"
"흥! 먹을 생각 없으면 아저씨가 상 치워. 난 밥 다 먹었으니까."
한 봉지를 전부 볶았는지 김과 배추김치 사이에 놓인 접시 위에 수북한 소시지 케첩볶음과 냄비에 가득 담긴 무국을 번갈아 쳐다보며 김병장은 뭔가 떠오를 듯 말듯 했다.
"곰탱아. 이거 일식삼찬인거 혹시?"
"어 그래. 국방부 레시피다. 꼬와?"
자리에서 일어난 설웅이 다 먹은 밥그릇과 국그릇을 싱크대에 얹어놓으며 퉁명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 아침 7군단 식단. 김, 배추김치, 소시지볶음. 무국. 쌀밥."
"휴가 나와서까지 일식삼찬인거냐."
"어떡해. 오늘 아침은 군대리아가 아닌걸."
"너 요점이 틀렸어."
"이 양반이! 남자가 뭐 그리 따져?! 먹기 싫으면 먹지 마! 짬처리할거야!"
자꾸 캐묻는 김병장에 자극받은 설웅이 식탁 위의 소시지 접시를 낚아채 싱크대에 부어버리려고 했다.
"야! 야! 누가 안 먹는데? 그리고 그거 많으니까 밑반찬 해놔도 되잖아?"
"진작 그럴 것이지."
심술궂은 표정의 설웅이 입가에 힘을 주며 퉁명스레 접시를 던지듯 식탁 위에 다시 내려놓았다.
"사람이 말이야 차린 정성을 봐서라도 좀…"
"곰탱이 하여간 성질은… 응? 뭐라고?"
"됐어. 얼른 쳐드셔."
그릇에 밥 퍼 담느라 말을 놓친 김병장을 향해 설웅은 아침부터 틱틱거리며 거실 베란다로 향했다.
"곰탱이 싱겁긴. 그나저나 이거 국 냄새는 제법 그럴듯한데 어디…"
숟가락으로 말간 무국을 한 숟가락 떠먹어본 김병장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웅. 너 요리 처음 해보는 거지? 이거 맛있는데?"
"흥! 빈말은."
"아냐! 진짜 국간도 딱 맞고."
비록 설웅이 만든 거라고는 국과 소시지 볶음 정도에 그것도 복잡한 요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 요리 해보는 사람이 기초중의 기초인 간을 제대로 맞춘 데다가 조리해도 맛이 쉽게 티내기 힘든 인스턴트식품을 뚜렷이 맛있게 만들어냈다는 것은 분명 칭찬해줄만한 일이었다.
"너 생각보다 요리 잘하네?"
"그럼 키 작고 지랄 맞은 여고생은 요리까지 못해야 하는 법칙이라도 있어? 씹덕물에 혼이 묶인 덕후 같은 소리하지 말고 얼른 먹기나 해."
"설웅. 잘 먹는다."
국방부 표준 식단 소량취사의 아침을 들기 시작하는 김병장을 흘끗 돌아본 설웅은 시선을 창밖으로 향하며 두 팔로 턱을 괴며 난간에 기대었다.
"도깨비~ 슛!"
창 밖 저 아래에 펼쳐진 중학교 운동장에는 치킨집 사장님의 필살기 커맨드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동네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 막걸리 포션을 빨며 4시간 풀타임 축구를 즐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여간 군대고 사회고 남자들은 공만 던져놓으면 무조건 축구 아님 족구야."
본인도 현역이지만 아무튼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는 지겹게 보고 들은 설웅이 중얼거리며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나른한 햇볕을 온몸을 쬐이며 살랑거리는 봄바람에 코를 살짝 움찔거렸다.
"그런데 아저씨."
"응? 왜?"
"아저씨는 친구 안 만나? 휴가 나왔잖아."
"나 친구 만나러 가면 너 혼자 뭐하게…가 아니라 걔네들도 바쁘고 뭐 그러니까! 하하…"
"내가 뭐 앤가. 아저씨 없으면 나도 혼자서 편하게 놀러가고 좋지 뭐."
본심 없는 맥 빠진 대화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끊기며 집 안에는 다시 조용한 구말 아침의 침묵이 흘렀다.
"곰탱아."
"왜."
어색한 침묵 때문인지 김병장은 되는대로 아무거나 물어보고 싶어졌다.
"근데 오늘은 뭐 할 거야? 어디 놀러가고 싶은데 없어?"
"글쎄. 어제 너무 무리했더니 별로…"
황사 없이 활짝 갠 맑은 하늘을 쳐다보며 설웅은 조그마한 하품을 터트렸다. 시원한 바람이 밤색 단발머리를 살랑거리며 부드럽게 뺨을 스치자 약간 졸린 기분이었다.
"아저씨."
"응?"
덜 풀린 피곤으로 삼분의 일쯤 눈을 내리감은 설웅이 약간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영화말야… 궁금하지 않아?"


몇 시간 뒤 정오. 월드컵경기장 내 극장.
"어서 오십시오."
남자 알바생의 상냥한 인사를 받으며 김병장은 매표소 앞에서 입을 우물거렸다.
"그… 두 장 주세요."
"죄송하지만 손님.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두 장 주시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케… 케이에프알엑스 두 장! 하난 청소년!"
꽤나 말하기 '쪽팔렸는지' 갑자기 소리를 빽 지르자 알바생은 황당해하면서도 주어진 책무를 완수했다.
"KFRX 일반 하나 청소년 하나 계산해드리겠습니다."
잠시 후.
"으으!"
표 두 장을 움켜쥔 채 김병장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소름에 몸서리치고 있을 때였다.
"아저씨! 여기!"
"야! 너 뭐야 그게!"
그사이에 또 뭔가를 현질해온 설웅의 모습에 김병장은 어이가 없었다. 팝콘과 콜라를, 그것도 제일 큰 걸로 말 그대로 끌어안고 있는 설웅은 안 그래도 작은 몸이 더 작아 보였기 때문이다.
"너 밥 먹고 한 시간 좀 넘었잖아. 그런데 또?"
"내 맘이다 뭐! 게다가 나 극장 오면 이런 거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고."
"하여간 곰 같은 먹성이야. 아무튼 빨리 들어가자. 금방 시작할거야."


[ 너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
[ 들은 그대로야. 아무리 상대가 언니라도 나 김 소위, 아니 강준씨 포기 못해. ]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이미 강준씨와!"
한 남자를 두고 두 자매의 갈등이 고조에 달하자 극장 안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있을 때였다.
"푸핫핫핫핫핫!"
'아무리 언니'님께서 스크린에 삿대질을 하며 씹던 팝콘을 장절히 튀기며 큰 소리로 웃어제꼈다.
"아저씨! 들었어?! 아 나 미치겠다 진짜! 이거 올해 최고의 개그영화야!"
"야 조용해! 극장 너 혼자 전세 냈냐!"
뻔뻔할 정도의 영화 대사와 뻔뻔한 옆자리 선임 때문에 김'수준' 중위는 홍당무를 넘어 사색에 가까운 검붉어진 얼굴로 설웅의 민폐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아저씨는 저거 웃기지 않아? 나야 그렇다 치고 화이트는 아주 색기담당 배우네?"
지금쯤 대대에서 '왕고 없으니 내가 왕고다' 포스로 낮잠 자고 있을 왕형님의 심각한 왜곡에도 김병장은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다.
"웃기긴! 난 그냥 쥐구멍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거기 좀 조용합시다?"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뒷자리 관객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김병장은 사과의 말을 연발하며 그제야 기분을 좀 가라앉힐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효과는 채 10분을 못 갔으니.
"저, 저게 뭐야!"
갑자기 화면이 야릇하게 넘어간다 싶더니 선실에서 설웅 역의 여배우가 두리번거리며 나오고, 이어서 선실 안에서는 '김 소위'가 손톱자국이 난 근육질 어깨 위에 전투복을 걸치는 장면이 펼쳐졌다.
"으음! 우리 로봇 나오는 액션영화 보러 온 거 아냐? 뭐 이리 곁다리가 많아."
영화 덕에 행여나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김병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며 몸을 사렸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닮지도 않은 배우가 나오는 영화라도 좌웅우백의 전개에 빈정상한 설웅이 화난 표정으로 팝콘을 마구 우걱거렸기 때문이었다.
"어떡하면 12금 영화에서 베드신 장면이 나오는 거야?"
"심의란 게 그렇지. 온가족의 드라마에선 불륜에 칼부림이 나와도 되지만 만화에서는 과도도 몽둥이로 나와야하는 고무줄."
"아무튼 이거 진짜 인터뷰 하긴 한 거야? 완전히 아저씨 미화 영화인데? 혹시…"
설웅이 버터와 강냉이가루를 입에 흥건하게 묻힌 채 노려보자 찌릿한 눈길에 김병장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극구 부정했다.
"내가 미쳤냐! 행여나 인터뷰 했어도 창작으로라도 저런 소리는 안한다. 나 참…"
"아 좀 조용히 좀 해요!"
또다시 뒷좌석의 아까보다 한층 격렬해진 항의소리에 영화와 달리 엄청 소심한 김병장은 어깨를 콱 움츠러트리며 급격히 쫄아들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영화 내용은 그놈의 삼각관계와 히엔 1위로 추정되는 자위대 파일럿이 엄청나게 얍삽하게 나오는걸 제외하면 Mr.Bum식 표현으로 '견딜만하게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근데 왜 호야는 안 나오지?"
"제작비나 시나리오 문제 같은 어른들의 사정인가보지."
안 그래도 출연수 적은데 영화에서조차 찬밥신세의 염호를 안쓰러워하며 설웅은 콜라를 쪽 빨았다. 그렇게 사람 빼고 다 CG에 일부는 사람도 CG인 영화는 흘러흘러. 큼직한 팝콘 봉투라도 서로 집어먹다보면 여러번 손이 겹칠 만도 하건만 서로 너무 완벽한 호흡으로 손 안 겹치게 번갈아 집어먹으며 제법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오?! 이건 어떻게 안거지? 심해에서 1:1로 싸운거?"
"그야 아저씨가 떠벌리고 다녔겠지 뭐. 뭐 꼭 아저씨 아니어도 관련자가 밀리터리 사이트 같은데서 자랑질 하는 걸로 흘러나갈 구석은 많지만."
당시 전투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는 심해 전투 장면이 영화에서도 클라이맥스를 채우고 있는 것은 아마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비교적 비슷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여간 스크린 속 배우들이 김병장과 설웅이 보기엔 똥폼으로 보이는 모습으로 CG로 그려진 조종석 안에서 긴장 섞인 연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 적이다! ]
영화 속 파일럿의 김병장과는 억 만 광년 떨어진 멋들어진 목소리로 외치는 것과 동시에 갑자기 조종석 전면 스크린에 루트의 CG가 꽉 들어차자 극장 여기저기에서 깜짝 놀라는 탄성이 터져 나왔다.
"꺄아아!"
"으아아!"
…문제는 그걸 실제로 겪은 당사자들은 먹던 팝콘까지 뒤엎으며 제일 깜짝 놀란 것이었다.
"저거 뭐야 무서워! 저때 저랬었나?!"
"실제 루트는 안 무서운데 저건 되게 무섭네!"
둘이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크린을 가득 메운 고래형 루트에 식겁해서 놀란 가슴과 회로를 진정시키는 동안 졸지에 팝콘 집속탄을 맞은 뒷좌석의 관객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이 민폐듀엣을 죽여 살려 심각한 살의의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영화의 결말은 당시와 비교해서 '나름' 높은 재현도를 보여준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한마디로 쿵퍽쾅찍으로 끝난 영화 감상을 마친 설웅은 김병장과 함께 공원 밖을 거닐며 배를 슬슬 문질렀다.
"아, 배불러서 밥생각도 안 나네."
"응? 설웅. 뭐라고?"
"귓구멍이 막혔나. 배불러서 밥생각도 없다고."
"아… 아니 나는 네가 웬일로 밥생각이 없다고 하길래 설마 해서."
"아저씨. 까불면 저기에 묻어버린다?"
도끼눈을 뜬 설웅이 빳빳하게 세운 손가락으로 과거 쓰레기 매립지였던 하늘공원을 똑바로 가리킬 때였다.
"뱀프사마~"
"?"
"?"
묘하게 일본말인데 발음은 한국발음인 소리에 김병장과 설웅은 동시에 반응했다 그리고.
"뭐, 뭐야 저건…"
"코, 코스프레잖아…"
보라색 로브에 오렌지색 투구를 쓴 남자를 뒤따르는 검정 타이즈남 둘이 눈앞으로 지나가는가 싶더니, 지나간 코스튬플레이어들의 더 앞에는 수십 명쯤 될 사람들이 원색이 많이 들어가고 디자인이 과하게 또렷한 말 그대로 만화적인 옷을 입고 모여있는게 보였다.
"아저씨. 저게 말로만 듣던 그…"
"말로만이라니. 너도 가끔 메이드 코스하잖아. 전에 화이트가 너 아주 제대로 입은 것도 보여주던데."
"닥쳐 아저씨!"
'메이드'란 말에 설웅은 반사적으로 맹수가 먹이를 위협하듯 송곳니를 활짝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그건 변태박사가 절대명령어로 강요한거고! 그리고 그건 특정 캐릭터 코스는 아니었…"
"저기 있다. 그 빅토리안 메이드. 안경도 썻네?"
고학력 서민녀의 신데렐라 스토리에 나오는 캐릭터 코스프레를 가리키며 김병장은 설웅의 입을 봉해버리려 했지만.
"아니라니까! 그렇게 따지면 예비군은 다 밀리터리 리인액트고 반팔 흰 셔츠에 검정 바지만 입으면 다 찌질이 파일럿이게?"
"…그거 나 중학교 때 교복이었어. 덕분에 우리학교 애들 주변 학교 애들한테 얼마나 놀림 받았는데."
김병장의 별 같잖은 추억에 성질부리던 설웅은 그만 맥이 빠졌다.
"하아… 설마 아저씨 성격 그런 거 교복 탓은 아니지?"
"교복이 무슨 베놈슈트냐. 그런데 곰탱아."
"뭐?"
"…우리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냐?"
갑자기 서로의 실존적 문제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설웅은 현재 담론의 본질적인 문제를 집어내었다.
"…아저씨랑 붙어 다니니까 나까지 잉여력이 쩔잖아. 으으! 옛날에 난 안 이랬는데!"
설웅이 밤색 단발머리가 철썩거릴 정도로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현실을 부정하더니 허공에 조그맣게 시계창을 띄웠다.
"그런데 아무리 아저씨 집 근처여도 이왕 나온 거 영화만 하나 딸랑 보고 들어가기도 뭐하네."
"하긴 그렇지. 들어가서 할 것도 없잖아."
"그럼…"
'저쪽'으로 눈동자를 돌리며 설웅이 손가락으로 허공을 콕콕 찌르듯 가리켰다.
"심심한데 저거나 좀 구경하고 갈까? 소화도 할 겸"
"쓸개도 없는 반달곰이 소화는 무슨… 욱!"
참다못한 설웅이 정권으로 김병장의 배를 한대 끊어쳤다.
"자꾸 헛소리해서 장면 늘어지게 할래?! 아저씨 그러다 진짜 짤린다?"
"아… 예… 예…"
오랜만에 설웅의 주먹맛을 본 김병장은 배를 문지르며 금세 회초리 맞은 강아지처럼 얌전하게 뒤를 따라갔다.


어차피 코스프레 회원들도 보여주기 위한 모임인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더 즐기는 모양이었다. 간간히 어떤 만화 캐릭터인지 알아본 애들을 위해 사진촬영까지 해주는걸 보면 저것도 나름 서비스인가 싶기도 하고.
"우와! 저거 그 뭐더라?"
푸르고 두터운 중장갑복을 재현한 코스튬플레이어를 보며 김병장의 입에서 어떤 한마디가 한참을 맴돌다 터져 나왔다.
"스타 마린!"
"FOR THE EMPEROR!"
김병장의 오해에 자극받은 '마린'이 오른손의 볼터건을 높게 들며 외쳤다.
"50원짜리 케첩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건 워해머에 나오는 스페이스 마린에서 울트라 마린이란 겁니다. 그러니까 제국에는 말이죠…"
"…아 예. 제가 잘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아! 저기 일행이 있어서 그럼 실례합니다~"
박 소위도 가끔 그러지만 뭔가에 깊게 빠진 '애호가'치고 썰 풀리면 은근히 오래 붙잡힌다는 것을 잘 아는 김병장은 서둘러 사과하고는 후다닥 잰 걸음으로 앞서가던 설웅의 뒤꽁무니를 쫒아갔다.
"와, 그래도 대단하네. 아저씨 저거 봐."
"뭔데?"
"저기 저 여자. 아직 4월이면 그렇게 더운 것도 아닌데 빨간 조끼에 흰색 천만 두르고 빨간 치마만 입었어."
"저 고전을 코스하는 사람도 아직 있네. 야~ 그래도 잘 만들었다~"
부대에서 미싱으로 어설프게 오바로크 치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잘 아는 김병장은 솔직하게 감탄했지만 채 3초도 되기 전에 설웅이 초치고 나섰다.
"그러게. 직접 만든거라면 말이지."
"넌 꼭 그러더라."
"어때. 아님 말고."
"하여간 심술은…"
"그나저나 이게 한 동호회 사람들일까? 꽤 많데?"
"아마 연합 모임이나 그런 거 아닐까 싶은데… 하나 둘 셋 넷… 음?!"
설웅의 말에 괜스레 머릿수 세던 김병장의 시선을 확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야 설웅. 저기 너 있다."
"뭔 헛소리야. 어, 정말?"
순간 설웅의 눈이 살짝이 커졌다.
"뭐야. 어제는 가짜 아저씨를 보더니 오늘은 가짜 나를 보는 거야?"
"진짜 얼룩무늬 옷감 교복이네. 취향도 참… 하긴 너 그쪽으로는 알려진 것 같긴 하지만서도."
"그 이야기 그만해! 로봇인 내가 남들 노리개거리가 되는 게 얼마나 기분 나쁜지 아저씬 몰라!"
일전의 '코믹 동인지' 사건을 떠올리며 설웅은 과하게 언성을 높이며 오버했다.
"좋아! 이렇게 된 거!"
"야. 뭐 하려고? 잠깐!"
"변신!"
옷 갈아입을 때는 꼭 변신 소리 안 외치던 애가 변신까지 외치며 갑자기 복장 설정을 원래의 얼룩무늬 교복 차림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야야! 너 너무 힘들어갔어!"
"잘 보라고 아저씨! 진짜의 퀄리티를!"
"곰탱아 릴렉스! 아 진짜 왜 가는 데마다 이 꼴이야!"
종잡을 수 없는 럭비곰탱이가 또 다시 돌발행동을 하자 김병장은 툴툴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젠장! 이래서 쟤랑 휴가 붙여 보낸 게 분명해!'
"안녕하세요~"
'설웅 코스'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앞에서 설웅 원본이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어…예. 안녕하세요?"
키 162정도 되는 여자는 갑자기 똑같은 복장을 차려입고 나타난 150대가 될까 싶은 당돌한 꼬마애에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한눈에 '고퀄 코스'인 걸 알고는 금세 경계태세에 들어가는 것을 보며 설웅은 속으로 비웃었다.
'흥! 어디 진짜한테 개쪽당해봐!'
"아 쟨 대체 어디서부터 속이 꼬인 거야 대체…"
가끔 지나치리만치 밉살스러운 행동을 해대는 덕에 김병장은 또 다시 조마조마하게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저기 언니 그거 그 국방부의 그 로봇 소녀 코스 맞죠?"
"예? 어, 으음. 맞아."
키도 작고 나이도 어려보이니 상대는 금세 설웅에게 말을 놓았다.
"와! 그거 뉴스나 이런데서 가끔 나오긴 해도 별로 안유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코스한사람이 또 있어서 반가워요!"
"그래도 로봇 쪽에선 아무래도 이름이 있으니까. 이번에 영화도 나왔잖아."
"안 그래도 조금 전에 그 영화 봤는데요. 영화는 뭐랄까 진짜하고 별로 안 닮은 거 같아요."
"그렇긴 해. 안 그래도 영화 나올 때 그쪽에 예전부터 관심 있던 얘들은 인터넷에서 엄청 욕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언니. 아, 이거 초면에 자꾸 이래서 죄송한데요. 저하고 언니하고 누가 더 비슷할 것 같아요?"
"응?"
"저쪽에서 언니가 코스한 것 보니까 왠지 뭐랄까 경쟁심 그런 거 생기잖아요. 그래서 비교해보고 싶어서요."
약간 떨어진 발치에서 김병장이 병풍처럼 우두커니 서서 '유사시 사태 급변'에 대비해 상황을 지켜보는 가운데 설웅 코스녀는 설웅의 제안에 약간 빈정상한 듯이 대답했다.
"뭐 그러지. 저기 메카덕들 몇 있으니까 불러서 물어볼까? 세츠나쨩! 옵사장!"
코스녀가 저쪽에서 다른 코스중인 몇몇을 부르기 시작하자 설웅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기분 나쁘게 씩 웃었다.


그리고.
"아우 진짜 다들 해태 눈깔이야!"
"그러게 왜 본전도 못 찾을 짓을 하냐."
쓰레기 위에 흙을 덮고, 그 위에 쓰레기를 덮는 식으로 높다랗게 쌓인 마름모꼴 쌍둥이 산인 하늘공원을 올라가는 계단 위에서 설웅은 아이스크림콘을 거칠게 베어 먹으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아니 아저씨가 보기에 그게 어딜 날 닮았어! 다들 진짜를 놔두고 어떻게 가짜가 더 진짜 같다고 해!"
"너 국방일보에서 포샵질당하잖아. 너무 꼬마 같아서."
"아저씨까지 그러기야?!"
김병장의 말에 설웅은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빽 질렀다.
"쳇! 그래! 진짜 나는 키도 작고 꼬마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게다가 나 '꼬마곰'이라고 불리는 거 무지 싫어하는데 말야. 뭐 뭐 뭐? "넌 키도 작고 몸집도 작으니까 'F-5 스코시 타이거' 코스가 어울릴 거야." 라고?!"
본격 항공밀덕연애시뮬레이션에 나오는 직역하면 '조금 호랑이', 미군 속어로 의역하면 '작은 호랑이'라 불린 전투기 모에화 캐릭터 취급에 설웅은 분통을 터트렸다. 따지면 전차=곰 이면서 그러는 건 좀 모순이었지만.
"쯧, 아무튼 이제 화 풀어라. 그런 이야기도 있잖아. 채플린이 채플린 닮은꼴 이벤트에 재미로 몰래 참가했는데 겨우 3위였었다는 이야기."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영화 포스터를 괜스레 훑어보며 혀를 차는 김병장이었다.
"으아~ 그건 그렇고 이 계단 왜 이리 끝이 없어? 멀리서 봤을 땐 얕아보여서 만만하니 온 건데."
"여기 생각보다 높아. 이게 다 쓰레기 산이란 게 신기하지 않아?"
"사람들 먹고 싸는 게 다 그렇지 뭐. 아! 이제 끝인가 보다!"
마침내 계단의 끝. 공원 위에 올라오자 둘의 눈앞에는 신기한 경관이 펼쳐졌다.
"와… 나도 이 동네에서 15년 넘게 살았지만 여긴 처음 와봐."
그러면서 김병장은 주변을 휘 둘러보다가 고양시 방향으로 시선이 멈추었다. 특별한 건물이 가로막지 않은 경관은 마치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지평선이 맞닿아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여기가 이래서 하늘공원이구나."
"근데 막상 올라오니까 별거 없네. 억새하고 뭐 꽃 조금하고."
그러면서도 설웅은 보조가방에서 디카를 꺼내더니 막 자라올라 시푸른 억새 사이에 피어난 보라색과 흰색, 자주색 꽃들이 어우러진 작은 꽃들판을 사진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래도 요 몇 달 동안 삭막한 것들만 보다가 이런 거 보니까 좋다. 그치 아저씨?"
"야. 너 왜 그래. 무섭게."
평소에 지지고 볶는 성격만 봐오던 김병장은 휴가 나오고 보니 은근히 소녀적인 면이 있는 설웅의 행동에 도리어 위화감이 마구 들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아저씨!"
"응?"
"우리 사진 안 찍을래?"
"내, 내가?! 네가 나랑?"
"어. 생각해보니까 경복궁에서 각자 사진 찍었잖아. 그래도 둘이 휴가 나왔는데 인증샷은 찍어야지?"
"글쎄 그게 좀…"
"그게 좀은 뭐가 그게 좀이야. 나도 좋아서 그러는 건 아냐. 그래도 이젠 1년 다 되가니 빼도 밖도 못하고 아저씨가 파일럿이고 내가 기체인데 친구끼리 사진 한방 못 찍을까. 저기요~ 잠시 만요!"
재빠르게 반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설웅은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젊은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하러 갔다. 그리고 뭔가 핀트가 어긋난 설웅의 논리에 머쓱한 기분이 든 김병장은 뒷머리를 긁적거리기만 했다.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셋."


"강가여서 그런지 바람은 진짜 잘 분다."
밧줄로 된 난간에 기댄 김병장은 불어오는 강바람과 길어진 오후 햇빛을 여유롭게 만끽하고 있었다.
"어디 사진 찍은 것 좀 보자…"
그리고 설웅은 디카의 화면창을 돌려보며 조금 전 찍은 사진을 재빨리 확인하더니.
"꽃 찍은 거 잘 나왔네. 나중에 부대에서 뽑아야겠다."
라며 짐짓 딴소리를 했다.
"생각보다 여기 꽤나 조용하네."
"아저씨도 그래? 좀 적적한 느낌이지? 일요일 오후인데도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바람과 햇살이 뺨을 톡톡 치는 느낌에 설웅은 꽤나 아늑한 모양이었다.
"아, 설웅."
어쩌다보니 영화 포스터로 하릴없이 종이비행기 접기 시작한 김병장이 손놀림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내일은 뭐 할 거야? 오늘이야 쉬니까 그랬다 쳐도."
"글쎄. 딱히 구경할게 또 있나?"
"아직 시내에 못가본데도 많잖아. 인사동이나 구경 다닐 곳은 꽤 많아."
"아 맞다! 아저씨 그럼 내일 놀이공원 갈래? 그 서울엔 실내 놀이공원 있다며?"
"놀이공원? 맨날 전투나면 뛰고 구르면서 360도 전방위로 도는 거 지겹지도 않아?"
"싸워서 뒹구는 거하고 놀면서 뒹구는 거하고 같나. 뭐."
"하긴 그렇지…"
분위기가 사람 만든다고 괜히 진지해진 김병장이 다 접은 비행기를 허공에 던지자 강바람과 오후의 따뜻한 공기에 던져진 종이비행기는 괘나 높이 날아오르더니 멀어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쓰레기 무단투기야."
김병장이 날린 종이비행기를 보며 설웅이 시답잖은 소리를 했다.
"그래도 잘 날잖아? 아저씨가 접은 거 치고는."
그 말에 김병장은 고개를 획 돌려 설웅을 쳐다보자 설웅도 질세라 고개를 돌려 김병장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몇 번을 말해 곰탱아. 이래봬도 공돌이라니까. 나 생각보다 손재주도 좋다고!"
"흥! 그럼 그 좋은 손재주로 전투때 잘 좀 하시던지!"
옛날이었으면 즉시 현피였겠지만 이제 서로에게 익숙해졌는지 이런 소리가 농담으로 오가는 둘이었다. 그것도 서로가 서로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러고 있자니 문득 김병장은 설웅의 얼굴을 오밀조밀 이렇게 쳐다본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며 뭔가 살짝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응?!"
하지만 그 순간, 설웅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저 멀리 서울 시내 한복판 어디선가 은은한 폭음소리가 둘의 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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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정되어있던 내용이었는데

어떻게 또 시국이 하 수상하야(?)

우연찮게 그쪽 이야기가 돼버렸네요.
그나저나 이번 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패러디 짜깁느라 애먹었습니다.OTL

 

안 돼 김병장 너 그러다 잘못하면 발목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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