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코드기어스 : 반역의 를르슈 애니메이션
2010.01.03 02:31 Edit

이제사 이 물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방영 당시엔 딱히 관심이 없기도 했고..;;
이 작품에 대한 사실성과 사상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분들이 이야기 했기에 그것 하나하나 이 포스트에서 또다시 지적해 나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어째서 이러한 작품이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를 짚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작품의 표면에 드러난 문제점 보다는 그 원인을 복기해 보는 것이 아무래도 이 시점에서는 더욱 유익하겠지요.
CLAMP와 선라이즈의 합작이라는 것은 방영 전부터 여러가지로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소년 취향 로봇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대명사 선라이즈와 소녀 만화의 거장 CLAMP가 함께 팀을 꾸린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물론 선라이즈가 건담SEED로 여성향 시장에 발을 들이밀기 시작했고, CLAMP는 이미 마법기사 레이어스를 시작으로 카드캡터 사쿠라, 엑스, 츠바사 크로니클 등으로 남성향 시장에서도 무시 못할 영역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말이지요.
CLAMP의 미형 캐릭터가 선라이즈의 능숙한 어레인지에 의해 깔끔하게 디지털화 되었다는 것은 분명 성공적인 부분입니다. 마법기사 레이어스 이후로 어느정도 정형화 되어 최근의 작품 "코바토"까지도 이어지고 있던 CLAMP 캐릭터의 애니메이션화 방식에 전혀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은 굉장히 훌륭한 부분입니다. 특히 를르슈의 표정 연출같은 것은 CLAMP 원작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겠지요. CLAMP가 처음 그려낸 디자인을 선라이즈에서 소화 하여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렸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의 부분에서는 수준 이하의 평가를 받고 있지요. 이 부분에서 CLAMP의 존재가 악재가 되었다고 봅니다. CLAMP의 캐릭터들은 대체로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재에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상이라는 겁니다. 모두가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가치에 매달려 서로 모순되는 자신의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 인물간에 갈등하는 것이 CLAMP식 스토리의 전형입니다. 이 과정에서 실재적 현실과의 마찰은 의도적으로 배제되어 있거나 최소화 시켜서 독자들에게 거의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LAMP의 많은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이러한 비현실적 인물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역시 소위 CLAMP 월드라고 불리는 비현실적 세계라는 겁니다. 이러한 배경 위에서 이 인물들의 행동이 적합성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들의 갈등도 설득력을 얻지요.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마법기사 레이어스"일 겁니다. 이 작품에서 현실의 마찰이란 요소는 감춰지기 보다는 오히려 인물들의 목적 아래에 완벽하게 종속되어 있지요. 각자의 생각과 마음에 의해 세계도 변화해 간다는 레이어스의 독특한 세계관이야말로 이러한 CLAMP의 특징을 잘 포여준다고 볼 수 있겠지요.
문제는 를르슈와 스자크가 살아가는 세계는 CLAMP 월드가 아니라 선라이즈 월드라는 겁니다. 선라이즈의 오리지널 SF/판타지 작품들은 항상 어느정도 현실과의 접점을 가지며 끊임없이 시청자들이 발 디디고 살아가는 세계를 모사하려고 합니다. (물론 최근 "마이히메"를 필두로 하여 모에 중심의 작품을 제작하는 선라이즈 제8 스튜디오의 제작 경향은 좀 예외이겠지요.)
우주세기 건담은 세계대전과 동서 냉전이 주요 모티브였습니다. 이 시절엔 일본은 세계대전에 주축국의 일원을 참가한 끝에 비참하게 패전했고, 그 이후로 이어진 냉전에서도 서방의 일원으로 어느 정도의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한때는 미국과 서방 세계의 패권을 다투기도 했습니다. 이 시절의 일본인들에게 전쟁은 직접 겪은 기억이거나 적어도 어느정도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실재로 현실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전쟁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는 작품들도 많이 볼 수 있었지요. 이후로 전공투의 실패를 겪은 좌익 아티스트들이 애니메이션계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된 부분도 있을 겁니다. 소련이 붕괴한 90년대에도 이러한 경향은 관성으로 계속 이어지게 됩니다만 아마도 에반게리온을 계기로 해서 현실로 존재하는 전쟁이란 것은 적어도 애니메이션에서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고 봅니다. CLAMP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도 에반게리온 이후라는 점은 생각해 볼만한 부분입니다.
20세기를 닫는 사건이 베를린 장벽 붕괴와 걸프 전쟁이었다면 21세기를 여는 사건은 9.11 테러가 될 겁니다. 이 시점부터 전쟁이란 것이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다른 의미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뉴스를 통해서 충격은 전해져 오지만 이 충격을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지구의 어딘가는 엄청난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그것이 일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겁니다. 점점 전쟁이 현실감을 잃어가기 시작합니다. 감독이 9.11을 직접 거론하며 만들어졌던 건담 SEED는 그런 맥락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전쟁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이를 보조해줄 이론적 도구는 (적어도 그들이 보기에) 전무했던 것이지요. 결국 최초의 기세와는 다르게 21세기에 20세기의 건담을 그대로 답습하는 자기 복제에 머물 수 밖에 없었고, 외적인 부분을 베껴내고 있을 뿐 과연 전쟁이 인간에게 있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엔 전혀 대답을 해 내지 못했지요. 그러다보니 소위 헤이세이 3연작처럼 주인공과 그 주변 인물의 드라마에만 치중하는 과오를 또다시 답습할 수 밖에 없었겠고요. 초기의 의도는 종영 시절엔 이미 간 곳이 없었습니다. 키라의 마지막 대사는 아마 '우리는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였던가요. 제작진이 스스로에게 물은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이렇게 현실을 작품 속에 담아내야 했던 리얼로봇 장르가 현실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표류 하고 있던 와중에 CLAMP적 인물들이 선라이즈의 세계에서 주인공을 하겠다고 나왔으니 재앙도 이런 재앙이 또 있겠어요? 세계에 대한 담론을 세우려 하지만 이야기는 개인의 언저리를 표류할 뿐입니다. 그나마 그 개인들조차 현실성이 없습니다. 해법으로 제시하는, 혹은 작품 내에서 시도되는 여러가지 방법들은 이미 20세기에 닳고 닳아 떡밥으로 쓰기엔 너무 낡은 것들 뿐입니다. 우리는 혁명과 메스미디어의 시대를 지나 오면서 그 모든 것들의 가능성과 한계를 이미 모두 검증한바 있습니다. 결국 작품은 시청자들에게 '이거 뭐야?' 라는 실망감만 안겨주다가 끝내 21세기의 제작자라면 손을 대선 안 될 인류보완계획이라는 주화입마의 나락을 떨어져 내리지요.
그냥 팔렸으니까 그걸로 좋은 걸까요? 그건 아니겠지요. 그 업보는 지금 와서 받고 있잖아요? 이렇게 비틀거리고 제자리를 못 잡던 로봇물 장르는 마크로스가 26화로 제작되기에 이르러 마침내 요즘엔 로봇 애니메이션이 단 한편도 없는 시즌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당장 팔리는 것들만 눈을 돌리더니 장르 자체가 망했으니 이를 어쩝니까. 덕분에 우리 하사호도 업종 전환을 해 버렸고 말이지요. (OTL)
아즈마 히로키는 이것도 포스트 모던 시대의 커다란 이야기의 조락의 사례라고 이야기 하겠습니다만 이거 정말 해법은 없는 것이려나요.

오타 지적입니다.
인류보'안'계획이 아니라 인류보'완'계획이죠...^-^;;;
어쨌든 좋은 글 잘 봤습니다.
하여간 타케P의 쓰잘데기 없는 개똥철학 때문에 작품 다 망쳐놨죠...;;;